마음을 다해 목포를 사랑했던, 샬롯 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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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목포를 사랑했던, 샬롯 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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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 벨(한국면 인사례)과 그녀의 남편 린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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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호 목사 (목포 하누리 교회)
[기독미션=전남도민일보] 1960년 샬롯은 목포로 내려갔다. 아버지가 복음과 생명을 개척한 목포, 자신이 최초의 외국 아이로 태어난 목포, 만 2살의 어린 아기인 자기를 놔두고 어머니를 먼저 하늘로 보낸 목포, 그리고 이제 사랑하던 남편 린튼마져 먼저 하늘로 가버려 또다시 버림과 외톨이가 되어버린 샬롯은 자신의 마지막 인생을 불태울 새로운 각오로 목포로 갔다.

그녀의 나이, 이미 환갑을 넘어 62세 때의 일이다. 목포는 그녀에게 동병상련의 도시이다.

샬롯(Charlotte Witherspoon Bell Linton, 인사례, 1899~1974), 그녀는 117년 전인 1899년 1월 6일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목포에서 태어난 최초의 외국인 아이였을 것이다.

아버지인 유진벨은 목포와 전남 선교의 개척자였으며, 어머니 로티 위더스픈은 미국 독립운동을 이끌던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나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자녀들의 현실과 삶은 상당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험하고 고된 길이었다. 샬롯은 겨우 만 2살을 넘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먼저 잃어야 했다. 로티가 갑작스레 심장병으로 1901년 사망한 것이다.

너무도 일찍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샬롯은 미국 할아버지 집에 보내져 성장기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청년이 되었을 때, 자신도 부모에 이어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왔다. 그녀는 한국에 온 최연소 선교사였던 린튼(인돈)과 1922년 24세에 결혼하였다. 남편 린튼은 10년 전부터 호남에 선교사로 와 일하고 있었다. 린튼과 샬롯은 군산, 전주의 기독교 학교, 그리고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 및 교육 사역에 힘썼다.

1960년 8월 남편 린튼은 건강 악화로 먼저 하늘나라로 가자, 샬롯은 주저없이 목포로 내려갔다. 목포가 자신에게 무슨 마음의 빚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버림과 소외의 동병상련이라도 늘 있었던 걸까?

남편을 잃고 다시 홀로 된 샬롯은 낙망과 슬픔을 딛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기 어머니를 빼앗아 간(?) 목포를 찾아, 생명과 구원의 사역자로 거듭 헌신한 것이다. 이미 자신도 환갑이 넘긴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목포 정명 여학교와 고등성경학교에서 마지막 생애를 불태웠다.

1963년 12월, 그녀는 편지에서 자신이 오랜 전부터 뇌졸중을 앓고 있으며, 몸이 회복되거나 치료되긴 어려워 보이며, 아마도 다음 해 미국으로 돌아가면 이제 다시 한국으로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밝힌다.

“처음 뇌졸중을 앓았던 때로부터 딱 10년이 지나고 뇌졸중이 재발했습니다. 회복은 그 전보다 더디고, 아마 완치되긴 힘들어 보입니다. 저는 한국말도 영어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쓰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아마 돌아오는 6월에 집에 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샬롯, 1963. 12. 2)

실제 그녀는 1964년 은퇴하여 부모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샬롯은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목포와 호남 한국에서 자신의 청춘 40여년을 헌신하고 수고한 아름다운 일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린튼과의 사이에서 난 4명의 자녀와 또 그들에게서 난 여러 손자들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한국 곳곳에서 생명과 복음의 열정 헌신을 다하고 있다.

인사례, 선교사 2세로 나고 살아가는 개인의 일생이 참으로 힘겨웠지만, 그에게 미친 하늘의 은혜와 손길은 그녀의 삶을 붙들어 하나님 나라와 미션에 온전한 헌신과 열심 담게 하였으니 목포를 사랑하고 호남과 한국을 온 생에 담은 참 여장부 아니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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