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성문교회 방문 때 우연히 접했던 서서평 선교사의 제주 지역 여전도연합회 조직 당시 사진.
●서서평 선교사는 말한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서서평 선교사의 별세후 부음을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었던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고 적힌 글귀는 바로 서서평 선교사의 평생의 좌우명이었다.
그녀는 군산 구암병원, 서울 세브란스병원, 광주 제중원(현 기독병원) 등을 두루 거치며, 한국간호학회를 창립하고 여러권의 간호학 교과서를 내는 등 우리나라의 간호학 태동기에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서서평은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쓰기도 했다.
그녀의 정신과 삶은 양창삼, 양국주, 홍정길, 임낙경 목사라는 걸죽한 인물들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누군가 그녀의 삶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면 볼수록 생명과 가치라는 유산을 발견하고야 말 것이다.
●서평이 걸었던 양림동 길…
2014년 양림동 어비슨 카페에서 양국주 선교사를 만났다. 1910년 당시 목포를 거쳐 광주로 부임한 신임 선교사 존 탈미지의 기록을 보여준다.
‘광주가 신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로는 커녕 꾸불꾸불 좁은 골목길이 가득한 조그마한 성벽도시였고, 양림동 언덕은 기와로 덮인 몇 채의 정부 건물만이 있었다’
광주 도심지로부터 1.6킬로 떨어진 곳 메마른 언덕, 양림동. 해발 109m의 산자락에 동네가 들어섰고, 복음의 전초기지가 됐다. 혹한의 추위 속을 뚫고 이역만리 미지의 국가인 한반도에 찾아든 선교사들의 뜨거웠던 삶이 백년이 지나도록 살을 에이는 겨울 추위보다 더 깊이 깊이 파고든다.
쉐핑은 걸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화려하거나 귀티가 나는 드레스가 아니었다. 시골 여느 아낙이 입고 있을 허름한 저고리에 남자들이 신었을법한 검정 고무신을 신고 양림산을 쉼없이 오르내렸을 그녀의 발자취와 숨결이 곳곳에 스며있다. 1912년 3월 19일에 광주에 왔고, 1934년 6월 26일까지 22여년을 살았던 광주땅 양림동이 그녀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신앙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마틴 사와인하트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며 자신이 겪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지울수 없는 그리스도의 흔적
1926년 서서평 선교사를 인터뷰한 매체의 기자는 그녀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게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소개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죽음이후 동료 선교사들은 그녀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했다.
메리 슬레서(Mary Slessor, 1848-1915)는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며 살신성인하여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되고 있는 여성 선교사다.
최초의 여성 개척선교사로써 스코틀랜드 태생이며, 가난과 가정불화로 얼룩진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27세의 나이로 나이지리아의 갤러바로 떠났고, 50년간 어떤 백인도 살아남지 못했던 오지마을 오코용 부족들 사이에 살면서 두 번의 휴가를 제외하고 부족들과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치료했다.
<다만>이라는 학교를 설립했고 기술을 가르치며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여 현지 부족들로부터는 “백인 어머니”로 추앙받았다.
맨발로 생활했고, 평범한 옷을 입고 억척스럽게 일했던 그녀는 평생을 아프리카식 진흙 움막에서 아프리카 식으로 살아 아프리카 원주민과 흡사했다고 전해진다. 말라리아에 걸려 여러차례 사경을 헤메기도 했으나 아프리카에서 성행한 주술과 마술, 사악한 풍습들을 없애며 ‘예수사랑’을 실천했다.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 사람들 대표 양국주 선교사
양 선교사는 서서평 선교사의 한국에 도착한 일자가 1912년 3월 19일이라고 했다. 서평은 부산에 3월 19일 도착했으며, 그해 2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한반도행 배를 탔다.
그리고 1932년 6월 10일 죽음을 앞두고 통상 25주년이 되어야 기념식이 열렸지만 그녀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20주년 만에 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서서평 양의 선교 20년 기념, 고아교육, 부인조력회 창립, 이일여학교를 설립”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양 선교사는 당시의 정황을 신문 지면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해주었다. “20개년의 긴 세월을 하루와 같이 꾸준히 교육 선교 구제 사업에 그 일신을 받친 서서평양의 기념식이 있었다. 지난 10일 오후 4시부터 광주 사립 이일학교 교정에서는 동교 교장 서서평 양의 선교 20주년기념식을 김필례씨 사회로 개최하고 류상원씨의 기념사가 있고 광주 15개 단체 연서의 감사장의 증정이 있고 최일순 씨외 10여명 내빈의 축사가 끝난 후 동 6시에 성황리에 산회하였다”고 한다.
이어 “서서평 양은 이로부터 20주년 전 3월 19일에 부산에 상륙한 이래 20년 동안에 병원의 간호원장으로 수만 명의 환자를 구제하였으며 혹은 전도사로 다니면서 부인 조력회를 창립하였다. 6년 전부터서는 자기 사재로 이일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여성의 교육을 위하여 분투중이라 하며 고아를 데려다가 양육하며 교육하여 성혼까지 시켜준 사람의 수가 실로 38명 등 다수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뮤지컬 서서평이 공연됐던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양국주 선교사.
●1920년대 광주에 심었던 겨자씨 같았던 복음
20세기 들어 광주의 모습.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당시 광주의 인접지역을 잇는 고갯길은 폭설로 끊기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 화순으로 가는 너릿재, 영광을 오가는 밀재 등은 폭설 때마다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었다.
물론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도 여전히 폭설은 인간의 삶의 여망을 흔드는 답답한 천재였다. 현재의 각화동과 문화동의 교도소 앞에서 담양 쪽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도동고개는 무등산과 가까운고로 고도가 낮았던 너릿재나 밀재보다 훨씬 해발고도가 낮았음에도 폭설로 두절되는 일이 아주 흔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런 땅이었다. 원시림이라고 하면 너무 과다한 표현일까? 무지와 문맹이 지배하는 땅이라고 한다면 너무 당시의 시대를 모르는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풍토병에 대책없이 죽어가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자녀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이 다양한 번영들에 대해 뭔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누리는 지금의 건강한 삶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다시한번 전할 수 밖에 없다. 서서평 선교사, 그리고 이름없이 빛없이 섬김을 다했던 선교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면으로나마 전하는 날이다.
강경구 기자 ksharim@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