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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학교 중심으로 확산된 ‘복음의 물결’

목포남-여학교, 교회출석·전도활동 의무화 교육으로 기독교 발전 선도 … 신사참배 반대·독립만세운동 주도 등 적극적 활동

2015년 05월 11일(월) 13:22
190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정명여학교의 1920년대 전경.
[기독미션=전남도민일보]김양호 목사(목포하누리교회)= 한눈에 보는 목포기독교회사

스트래퍼 선교사
●목포 여학교
목포여학교는 1903년 9월 15일, 스트래퍼 선교사가 초대 교장을 맡아 조긍선 교사와 함께 학생 수 명을 데리고 시작하였다. 목포에 온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던 스트래퍼(Miss. Fredrica Elizabeth Straeffer, 서부인, 1868~?)는 1899년 초부터 목포교회의 여성과 아이들을 주로 책임 맡고 있었다. 조긍선 교사와 함께 몇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첫 학교를 시작하였지만 다음해 봄 학교가 중단되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목포 여학교는 1대 스트래퍼를 포함하여, 4대 마율리, 6대 맥머피, 9대 하퍼 등 4명의 독신 교장들로 이들은 독신 여선교사로서 학교를 책임 맡는 등의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어 5대 교장 유애나(Mrs. Nisbet)는 최초 전문 교육선교사였고, 7대 교장 김아각은 그동안 여성들이 맡았던 교장직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남자 목사로서 교장을 맡기도 했다.

최초의 근대식 서양교육기관인 목포여학교의 출발과 운영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1대 교장 서여사가 불과 6개월 여만에 학교를 떠나게 되니, 학교가 2년여 휴교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변부인(Mrs. Preston)이 다시 학교 문을 열고 하부인(Mrs. Harrison)이 이어서 학교를 맡았으며. 쥴리아 마틴(Miss. Julia A. Martin, 마율리, 1869~1944)이 4대 교장을 하면서, 보다 진전있는 학교운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목포여학교는 1910년 6월 보통과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애순, 최자혜, 박경애, 김세라 4명이었다. 박애순과 최자혜는 상급학교에 진학 교사가 되었다. 박애순은 광주수피아여학교 고등과를 또한 1회 졸업, 수피아여학교 교사를 지냈다. 최자혜는 미국유학하여 대학교 학사 학위를 받고 1928년부터 모교 정명여학교 교사를 했다. 박경애는 박화성(보등과 2회 졸업)의 친언니였고, 김세라는 졸업 직전 일찍 결혼하였다.

미 남장로교 1909년 900불의 예산으로 여학교 교사 신축하였다. 해리슨 목사 주도로 공사하여 1912년 니스벳 교장 시기에 105평의 2층 석조건물 완성(현재 이 건물 소멸)하였다. 여학교는 2년제 중등과정을 신설하였고, 이어 78명의 여학생들이 등록하여 남학교 중등과정생보다 25명이나 더 많은 수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목포 여학교는 1914년 3월 중등과정 첫 졸업식을 하였으며, 학교 이름을 정명여학교로 개명하였고 학제도 개편했다. 4년제 보통과와 4년제 고등과로 나뉘어 보다 체계를 갖추는 등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목포 항일 독립만세운동 주도
정명여학교는 1919년 목포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다. 4월 8일, 교직원과 학생들이 주도하여 항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벌인 운동의 귀한 사료들이 현재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교사 사택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1983년 2월 14일이었다. 건물의 천장을 뜯어내던 중 2층 문설주 위 천장 귀퉁이에서 문서더미가 발견됐다.

문서더미에는 붓으로 적은 김목사전(金牧師殿)이 있었으며, 3·1운동 당시 사용했던 3·1운동 선언서의 우송봉투속에 담겨 있었다. 이것이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는 5종의 문서다.

5종의 문서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동경유학생들이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독립선언서’ 인쇄본 1통, ‘조선독립광주신문’이라는 제하의 인쇄물(지하신문) 1본, “경고아이천만동포”(20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로 시작하는 격문 1매, 거칠게 손으로 적은 듯이 보이는 독립가 사본 1매다.

1919년 4월 8일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과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학생 등을 포함한 150여 명이 거리로 뛰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는 일본인 교장에 의해 민족운동이 억압된 반면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된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의 경우는 일본의 간섭이 적어 만세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명여학교 박금엽 동문은 3·1운동 당시 고등과 2년이었으나 만세운동으로 학교가 휴교돼 졸업장을 받지 못했고, 남편 양병진 씨는 3·1운동 당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해로 갔으나 약혼자가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투옥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커밍(김아각) 선교사

●학교의 발전,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
1920년대 이후 커밍(Daniel James Cumming, 김아각, 1892~1971)과 하퍼(Miss. Margaret Hopper, 조마구례, 1886~1976)는 폐교될 때까지 학교를 이끌었다.

1920년 놀랍게도 학생 수가 290 명으로 크게 늘었다. 교실이 더 필요해졌다. 선교부는 미국교회에 지원을 요청했고, 1923년 1월에 석조 3층 240평 새 교실을 지었다.

맥콜리 부인(Miss. Green McCallie)이 1만불 기부하여 건립하여서 이때는 ‘맥컬리기념여학교’라 하였다. 선교부는 별도로 2,500불을 지원하여 7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건립하였고, 1천 평의 운동장도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들 건물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

학교는 1924년 6월들어 보통과 6년, 고등과 4년으로 학제 변경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시국은 만만치 않았다.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조선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사는 일본 민간종교 신도(神道, Shintoism)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각 지방 마다 신사를 세웠다.

일제는 조선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조선인으로 하여금 여기에 절하며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우선 각급학교 학생들 먼저,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기독교계 학교 등에서는 이를 거부했고 폐교를 마다하지 않는 등 결사적인 대항을 서슴치 않았다.

호남에서 사역하던 미 남장로교 선교부는 학교가 폐교될지언정, 신사참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36년 11월 전주에서 열린 선교부 연례회의는 미 선교본부 책임자 풀턴이 내한하여 중요하게 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풀턴(C. Darby Fulton)은 일본에서 출생한 2세 선교사로서, 일본의 신도가 단순한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신사참배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와 관계가 됩니다. 즉 유일신론이냐 다신론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반 기독교 신자이거나 교파의 지도적인 인물을 막론하고 정부가 신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사참배 의식이 기도라든지 신령을 부르는 것 등의 종교적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누가 보더라도 종교적인 성질을 띠고 있다는 인상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라며 뜻을 밝혔다.

풀턴은 1937년 2월 호남에 찾아와 이른바 13개 항으로 된 ‘풀턴 선언(한국 학교에 대한 정책)’을 통해, 신사참배 거부하고 학교 폐쇄한다고 천명했다. 이에 호남 5개 선교부에 있던 10개 기독교학교는 그해 가을 일제 당국에 폐교 신청하고 학교 문을 닫았다. 목포 정명과 영흥학교는 9월 6일에 폐교하였다.

그럼에도 이날 일부 교사와 학생들이 학교 밖을 나가 신사참배하는 일이 있었으며, 학교장 커밍(김아각)과 마가렛 하퍼(조마구례)는 돌아오는 이들을 교문을 폐쇄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명여학교는 이후 일제에 의해 목포여자상업학교로 쓰이기도 했다.

1947년 9월 23일 목포정명여자중학교로 복교(재개교)하여 보육과를 병설하였고, 10대 교장 최섭이 취임하였다. 기존의 목포여상은 항도여중이라 개명하여 목포 역앞으로 나갔다.

1962년 12월 고등학교 설립하였고, 1964년 3월 31일 호남기독학원을 설립하였다. 해방이후 60년대 초 이사회는 미 남장로교 선교부의 조마구례, 유화례 선교사 등이 계속 책임 맡았었다.

●목포 남학교
1903년 9월 9일 유진벨, 임성옥, 유내춘 등이 학교를 세우기로 발기하였고, 9월 15일에 목포 남녀 학교를 동시에 개교하였다. 1906년에는 프레스톤 목사, 유내춘, 남궁혁이 교사로 학교를 이끌었다.

1907년 10월 10일 중학부 과정을 신설하였으며, 교과과정은 초등 1학년 : 성경, 국문, 한문, 습자, 2학년 : 산학, 3~4학년 : 산하기 지리. 중등과정 : 성경, 역사, 과학, 기독교서적, 국문(한문), 작문, 음악과 미술 등이었고, 남학생은 근로사역에 여학생은 다림질과 바느질등의 교과외 활동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주일 교회출석이 의무였고, 주일 오후엔 거리 전도활동이 필수였다.

중등과정 15명 포함 80여명 학생들이 1908년 가을부터 새 학교 건물에서 공부시작하였다. 그 해 10월 10일 학교 신축하였는데, 프레스톤 교장은 자기 아버지가 목회하였던 남캐롤라이나 주 스파탄버그 제일교회와 담임 존 왓킨스 목사 후원을 받았다.

기부금 2천 달러로 강당과 교실 2칸짜리 겸한 40x42자 규모의 석조건물, 호남의 최초 근대식 학교 건물이었다. 학교 이름을 기부자를 기려 존 왓킨스 아카데미(The John Watkins Academy)라 하였다. 이때 미국에서 교사하던 배너블(W. A. Venable, 우위렴)을 전임교사로 청빙하였다.

1911년 3월, 중등과정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14년 니스벳 교장 시절, 목포영흥학교로 개명, 4년제 초등과 2년제 중등에서 4년제 보통과와 4년제 고등과로 학제 개편하였다.

1928년 2월 미국 한 교회가 후원한 1만원 포함하여 2만원으로 석조 2층 174평짜리 교실 건축하고, 3천원을 들여 운동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만 화재가 나 기숙사가 전소되었다. 이에 미국 스파탄버그제일교회(1908년 신축 후원교회)와 라베넬(Mrs. H. E. Ravenel)씨가 기숙사 재건비용 3천불을 보내 2층 52평의 건물을 1929년 가을 완공하였다.

일제 신사참배 반대하다 다른 기독교학교와 마찬가지로 자진 폐교하였으며, 문태학교가 대신 사용하였었다. 1952년 문태중고는 용당동으로 이전하고 영흥학교는 복교하였으며, 현재는 상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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