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배우 장자연씨가 ‘성(性) 상납’ 강요를 폭로한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지 10년이 지난 올해 당시의 의혹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으나 무산됐다. 장자연 사건 의혹을 조사해온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 등 핵심 의혹에 관한 진상을 규명하지 못해 수사권고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올해 고(故) 장자연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유독 높았던 이유는 우선 정권이 교체됐으며, 장씨와 함께 일한 동료 배우가 책을 출간하고, 여러 언론에서도 10년째를 맞아 특집 보도를 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는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게 더 많은 사건이다. 장자연씨의 비극은 보수언론과 위정자들이 힘없는 여성을 짓밟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일어났다. 이런 파렴치범들이 여전히 목에 힘을 주고 행세하는 세상에서 ‘정의’를 찾기는 요원하다.

이 사건은 여성 연예인에 대한 인권 침해, 성상납을 매개로 이뤄지는 권력을 향한 추악한 로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만성적인 불평등, 선출되지 않은 무소불위 언론 권력의 횡포, 권력을 악용한 우리 사회의 온작 추악한 형태가 모두 해당된다.

장자연씨 사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여성이자 연기자로서 자신이 감당해야 수준을 훨씬 넘는 행위를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남성이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여성을 도구화 해 착취할 수 있도록 하는 가부장적 구조가 작동한 것이다.

둘째, 이러한 강요가 작동할 수 있는 배후에는 신인급 연예인들을 쥐락펴락하는 기획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장씨 입장에서는 기획사의 요구를 거부했을 경우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끝날 수 있다는 공포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성적 착취를 고리로 한 연기자와 기획사 간의 불평등한 계약관계다. 신인 여배우가 계약조건에 묶여 억지로 술접대 자리에 나갔다는 것부터 참석자들이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는 점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셋째, 각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뭉친 정치권과 언론, 그리고 기업들이 시시때때로 여성을 유린하고, 문제가 불거지자 조직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수사기관의 방조 또는 묵인도 크게 한몫을 했다. 장씨가 마지막 남긴 글에 성접대 강요 사실을 기록하면서 특정 언론사 사주의 이름을 밝혔는데도 검찰과 경찰은 모두 해당 언론 앞에 꼬리를 내렸다. 당시 검찰 수사에서 장씨가 지목했던 이들 모두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는 것은 권력의 추악한 뒷모습이나 다름없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것이 우리 검찰의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지난 10년간 묻혀있던 사건의 전말이 이번에는 밝혀질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과거사위는 공소시효 만료와 증거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한낱 핑계로 들린다. 과거사위는 장씨가 술접대와 폭행에 시달렸던 사실을 확인했고 범죄를 파헤치는데 미온했던 검경의 부실수사와 보수언론의 외압에 대해 사실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지만 수사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사단이 애초 강제수사 권한이 없이 시작한 데다 이미 10년이 지난 일이어서 진상규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바다. 수사를 받는 이들의 비협조와 증거인멸 등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각오하고 사건을 다시 규명하려 한 만큼 더 치밀한 준비와 조사가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사위는 장씨 소속사 대표의 위증 혐의에 대해서만 수사 개시를 권고하는 등 핵심 의혹은 규명하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다만 사건 당시 검경의 수사가 미진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성과로 볼 수 있다. 비록 실체확인은 못했지만 조사단에서 장자연 문건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한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사람들이 직접 들고 일어나는 것 뿐이다. 권력층의 낯뜨거운 행각과 비리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에게 면죄부만 쥐어줄 뿐이며, 앞으로도 이 같은 행위는 거듭될 것이다.